◈ 세상사는 이야기 ◈

사람이 하늘이다 - 수운 최제우

文敬壽 2011. 5. 19.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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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하늘이다 - 수운 최제우
조선의 지배계층은 믿고 의지하던 청나라가 영불 연합군에게 북경을 함락 당하는 것을 보고 놀란 터에 점점 번져가는 동학을 보면서 큰 충격에 휩싸였다. 양반들은 반상의 구별이 엄연한데도 ‘동학교도들이 양반과 상놈이 서로 공대하며 맞절’을 하는데 놀랐다. 동학은 정신개벽, 민족개벽, 사회개벽을 내걸었다. 개벽은 동학이 그린 유토피아였으며, 죽은 뒤에 얻어지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건설하는 유토피아였다.

모두가 주인인 세상을 꿈꾼 삶

1860년 4월 5일 많은 세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전국을 떠돌던 최제우가 집안 잔치 자리에서 몸에 심한 한기를 느끼고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집으로 돌아왔을 때 갑자기 하늘로부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당황한 최제우에게 그 목소리는 다시 ‘두려워하고 겁내지 말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上帝)라 부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라고 하였다. 상제는 흰 종이에 자기가 주는 부적을 받아 그리게 하였지만 최제우가 아들을 불러 그림을 보여주니 아들은 의아한 모습으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상제는 다시 최제우에게 그 부적을 태운 다음 물에 섞어 마시게 하였다. 그러한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가족들은 ‘우리 아버지가 정신이 나갔다’고 난리가 났다. 그들의 눈에는 허공을 향해 무릎을 꿇고 앉아 혼자 중얼대면서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이 바로 최제우가 도를 깨닫는 순간 이었다.

최제우의 본명은 제선(濟宣)이었다. 그러나 35세 되던 해 어리석은 백성들을 구하겠다는 생각에서 제우(濟愚)라고 고쳤다. 최제우는 몰락하기는 했지만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어머니가 재혼을 했기 때문에 재가녀의 자식이라는 사회적 차별을 받으며 자랐다. 아마도 이런 성장 과정에 겪었던 불평등이 그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최제우는 23세 때 집안 노비들을 자유민으로 풀어 준 다음 전국을 돌아다니며 피폐한 당시 사회의 모순을 보기도 했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입산수도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신비 체험을 거쳐 ‘내 안에 한울님이 있다’는 깨달음을 얻고 동학을 창도하였고, 집에 있던 계집종 두 명을 한 명은 며느리로 삼고 다른 한 명은 수양딸로 삼았으며, 자신의 깨달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에 전념하였다.

당시 조선의 지배계층은 믿고 의지하던 청나라가 영불연합군에게 북경을 함락당하는 것을 보고 놀란 터에 점점 번져가는 동학을 보면서 큰 충격에 휩싸였다. 반상의 구별이 엄연한데도 동학교도들은 양반과 상놈이 서로 공대하며 맞절을 하였다. 더구나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개벽을 들고 나왔으니 이는 체제 전복의 조짐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최제우는 1864년 41세 되던 해 대구 감영에서 좌도난정(左道亂正)이라는 죄목으로 죽임을 당했다. ‘좌도난정’이란 잘못된 도를 가지고 바른 도를 어지럽혔다는 뜻이니 지금으로 따진다면 국가보안법인 셈이다. 최제우의 생각은 한문으로 된 『동경대전』과 우리말로 된 『용담유사』에 담겨 있다. 특히 노랫말로 이루어진 8편의 『용담유사』는 한문을 모르는 일반신도나 부녀자를 위한 것이었다. 민중의 말로 쓰인 만큼 민중의 유대를 강화시키는 좋은 틀이 되었다.

사람이 곧 한울님이다

19세기 말 조선은 근대로 넘어가는 진통을 겪고 있었다. 사회 모든 분야에서 변화가 일어나면서 서민 지주나 부자가 된 장사꾼들도 생겨났지만 소작할 땅마저 빼앗긴 많은 농민들은 품팔이 노동자나 난전 장사꾼, 떠돌이 또는 도적이 되었다. 하지만 지배 세력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에 급급했고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유교 또한 더 이상 사회를 이끌어 갈 지도 이념이 되지 못했다. 더구나 청나라를 통해 들어 온 천주교와 유교의 갈등은 점점 심해져 갔고, 서양 세력의 침략 또한 심상치 않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정신개벽, 민족개벽, 사회개벽을 내건 동학사상이 나온 것이다. 개벽은 동학이 그린 유토피아였으며, 죽은 뒤에 얻어지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건설하는 유토피아였다.

동학은 한울님을 믿는 종교이며 최제우는 한울님을 천주(天主)라고 불렀다. 한울님은 내 안에 있는 존재로서 무한한 능력을 지닌 최고의 가치이며 믿는 사람에게 응답하는 인격적인 존재였다. ‘사람이 곧 한울님이다’는 뜻의 인내천(人乃天)은 자신의 참 모습을 깨닫고 이를 믿는 것이었다. 최제우는 내 안에 있는 한울님을 정성과 공경을 다해 모시면 세상사람 누구나 군자도 되고 성인도 된다고 하였다. 그 속에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생각과 함께 인간 주체에 대한 확신이 담겨 있다.

최제우는 자신이 깨달은 도를 사회에 펼치기 위하여 온 세상에 한울님의 덕을 널리 펼치는 ‘포덕천하(布德天下)’, 나라를 도와 백성을 편하게 만드는 ‘보국안민(輔國安民)’, 뭇 생명을 널리 구제하는 ‘광제창생(廣濟蒼生)’을 내걸었다. 그리고 ‘내 마음이 곧 너의 마음이니 하나로 어우러져 한 몸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동학은 이런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포(包)와 접(接)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포와 접은 지역을 토대로 사회 계층과 상관없이 이념적으로 뭉친 단위였으며 뒷날 갑오농민전쟁에서는 동학군의 조직 명칭으로 쓰였다.

동학사상은 크게 두 가지의 특징을 보인다. 하나는 반외세의 민족의식이며 다른 하나는 반봉건의 민중의식이다. 특히 민중의식은 모든 사람이 다 한울님이라는 생각에서 평등의식으로 나타났다. 그러한 예는 최제우의 뒤를 이어 2대 교주가 된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의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특히 최시형은 인내천을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 섬기듯 하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으로 발전시켰다. 한 번은 최시형이 어느 신도의 집에 머물렀을 때의 일이다. 저녁 무렵 그 집에서는 밥상을 정성껏 차려 내왔다. 그런데 주인과 마주 앉아 밥을 먹으려는 최시형의 귀에 물레 잣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물레를 잣고 있느냐고 묻자 주인은 며느리가 물레를 잣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자 최시형은 정색을 하면서 ‘며느리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 며느리도 한울님입니다. 우리는 밥을 먹는데 어떤 사람은 일을 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어서 이리 와 같이 밥을 먹게 하시지요.’라고 하였다. 하지만 남녀가 유별한데 그런 말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겠는가. 최시형은 밥 먹기를 거부했고 할 수 없이 주인이 며느리도 일을 멈추고 밥을 먹도록 했다. 다음날 그 집을 떠날 무렵 사람들이 교주님을 배웅하는데 어린아이가 칭얼대며 울었다. 주인이 손님 가시는데 운다고 아이를 야단치자 최시형은 어린 아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는 ‘이 아이가 바로 한울님입니다.’라고 하면서 야단 친 어른대신 아이에게 사과를 하였다. 이처럼 여자와 어린 아이의 인권에 처음으로 눈을 돌린 것도 동학이었다. 그런 점에서 동학은 신분이나 계층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창시자인 최제우 또한 다른 종교처럼 스스로를 신격화하거나 우상화 하지 않았다.

우금치에서 무너진 새 세상의 꿈

동학의 교세가 커지면서 1864년에 처형된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교조신원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전봉준이 주도한 갑오농민전쟁으로 이어졌다. 농민군은 척양척왜의 깃발을 내 걸고 심지어 서울에서 내려 온 관군을 물리친 뒤 호남의 중심인 전주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정부와 평화조약을 맺은 뒤 전라도 53주 전역에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집강소는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농민과 천민이 중심이 된 자치 기구였다. 집강소는 동학의 교리학습 단위이자 군대 단위였던 포와 접에 농촌사회의 계나 향약 같은 두레 공동체를 합친 성격을 지녔다. 그러니까 집강소는 군사공동체이자 종교공동체, 정치공동체, 생산공동체, 이념과 조직을 활용한 생활공동체였다. 지역에 따라 달랐지만 관과 공존하면서 관을 압도하거나 견제하기도 하고 일부 지역에서는 해체된 관을 대신하기도 했다

가을이 되면서 다시 전투가 시작되었고 이 전투에는 이제까지 무력 사용을 반대해오던 북접도 함께였다. 북접을 지도하는 최시형은 처음에는 전봉준을 국가의 역적으로 지목하고, 손병희에게 북접 농민군을 이끌고 남접을 막으라고 ‘벌남기(伐南旗)’를 주어 보냈다. 하지만 논산벌에서 마주했던 20만의 남북접 농민군은 북접 지휘자 손병희가 벌남기를 찢는 순간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공주성을 에워싸고 싸웠지만 결과는 패배였다. 당시 농민군의 모습을 가리켜 ‘서면 백산(白山)이요 앉으면 죽산(竹山)이라’는 말이 나왔다. 농민군이 산을 뒤덮었기 때문에 이들이 서 있으면 사람들의 흰 옷 때문에 온통 흰 산이 되고, 제자리에 앉으면 그들이 들고 있던 죽창만 빼곡히 서 있기 때문에 대나무 산이 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수적으로 우세한 농민군도 막강한 일본군의 화력을 이길 수 없었다. 우금치에서 패한 농민군은 마지막 논산에서의 결전을 끝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전봉준도 배신자의 밀고로 순창에서 잡혀 처형되었고, 흩어진 농민군은 화적이 되거나 부자들을 털어서 가난한 자를 돕는 활빈당, 영학당이 되었다.


갑오농민전쟁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반침략과 반봉건의 명확한 목표를 내세우고 새 세상을 건설하려던 농민군의 꿈은 그대로 남았다. 갑오농민전쟁은 전근대 조선의 모습을 완전히 무너뜨려 버림으로써 갑오경장이 나오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뒷날 무장 항일투쟁의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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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교빈 자세히보기